과거

한국 교회가 기억해야 할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 목사

변하지않는진리 2016. 1. 14.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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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기억해야 할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 목사 


주일이 되면 교회 갈 생각에 몸가짐을 단정히하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갈 수 있다는 자유가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비록 그 당연함 속에 우리는 많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지만 불과 100년전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교회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모든 자유가 억압되었던 100년전 일제 시대,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 굳건히 서 있던 믿음들이 모여 세계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견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지금도 그 이름을 전하고 있는 목사님이 있으니 바로 주기철 목사다.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애국과 신앙을 키워가다


주기철 목사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으로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창원군 웅천면 복부리(진해)에서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기철 목사의 집안의 어른이었던 주기효는 당시 우리 민족을 수탈하러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힘을 길러야 하며 그 힘을 기르는데는 교육이 최우선이라 생각하여 을사늑약 후인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렸었던 주기철 목사는 여기에 입학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주기철 목사의 맏형이었던 주기원이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주기철 목사는 어린시절부터 이 교회에서 자라나며 '소년 목사'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개통학교에서 교육을 모두 끝마칠 무렵 부산에 갔던 주기철 목사는 당시 춘원 이광수(이때까지만 해도 애국강연을 많이 다녔다.)의 강연에 감동을 받고 큰 뜻을 품은채  이광수가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진학을 결정하였고 그는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평양에서 활동하던 이승훈, 조만식 선생 등과 함께 신앙생활의 꿈을 이어간다.


이때 오산학교에서 정식 세례를 받은 주기철(당시까지만 해도 주기복)목사는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의 주기철로 이름을 바꿨고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뒤 산업을 일으켜 민족을 바로 세우겠다는 뜻을 품고 1915년 '연희전문대학' 상과대에 진학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앓고 있던 지병 안질이 심해져 이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오직 하나님의 길로 


지병으로 고향으로 내려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주기철 목사의 집안이 하고 있던 염전, 어업, 양조장이 한꺼번에 기울어지며 가세가 기운 것과 재산 상속문제로 일어난 불화였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그 가운데서도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며 교남학교에서 야학을 통해 청년운동에 정열을 쏟았고 이기선 목사가 소개해준 안기영의 막내딸 안갑수와 결혼을 한다.


이후 3.1운동에 참여하여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하였고 주체적으로 참여를 하였으나 결국 3.1운동은 실패하게 되었고 그의 형제들도 실망을 안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신앙을 키워나갔고 1년 후 1920년, 당시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부흥목사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참여 한 후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통곡을 하며 죄를 회개 했으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 집회 이후 그의 인생이 바뀌는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해 11월 그는 마침내 신학생이 되고자 결심하였고 192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양산읍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30살이었던 1926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주기철 목사는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어느덧 세 아들의 아빠가 되었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


|주기철 민족의 부흥을 이끄는 목사가 되다


이후 그는 1926년 당시 설립된지 33년 되는 부산 초량교회에 처음으로 목사가 되었고 기도와 함께 교회의 교육, 재정관리에 철저하게 임했으며 사례비는 항상 반을 교회에 돌려주었다. 또한 모두가 굶주리던 시절 배고픈 사람을 위해 구제, 선교에 힘썼고 말씀으로 지키며 나라에 대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100명의 교인은 1년만에 300명으로 늘어났고 친정의 땅 6천평을 팔아 구제에 앞장섰다. 이후 그는 경남 노회에서 부회장 25회 노회에서 유임되며 많은 교역자들에게도 존경 받는 목사중 하나였다. 


이때 그는 구덕산 기슭에 기도처를 정해 놓고 항상 밤샘 기도를 했으며 내려 올때는 온몸에 땀이 가득했고 목요일부터 설교원교를 쓰고 토요일 밤까지 수십번씩 낭독하는 정열을 보였다. 또한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과 당시 신이라 자부하며 일제의 천황에게 참배야 한다는 신사참배를 십계명에 어긋나며 결코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여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하였고 가결 받았다. 


1933년 초량교회에서 마산의 문창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그는 목회자 문제로 시끄러웠던 교회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1933년 일제의 군국주의와 욕심이 극에 다다르고 있었고 주기철 목사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민족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였다. 하나님 역시 이러한 주기철 목사의 열정에 감동하셨는지 문창교회는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때 주기철 목사의 부인이었던 안갑수 사모가 죽었고, 두 아이가 죽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또한 경남 노회 전반부에 들끓기 시작한 이단의 등장, 자신의 멋대로 교리해석을 하는 목사들의 등장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와 수없이 세워지는 신사들에 주기철 목사는 가슴아파했고 눈물로 기도해야만 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주기철 목사의 이러한 열정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계속 되었기에 과로, 영양실조 등으로 몸이 급속도로 안좋아졌는데 1934년 주기철 목사의 건강을 염려한 제직들이 주기철 목사의 재혼문제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안갑수 사모의 유언도 있었기에 오정모 사모를 주기철 목사의 두번째 사모가 되길 추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정모 사모는 처음에는 동경하는 주기철 목사에게 누가 될까 거절하다가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을 고비를 거치게 된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혼인하게 된다.


오정모 사모의 수발 덕분에 주기철 목사는 몸을 일으켜 당시 날뛰던 일제에 맞서기 시작했는데 일제도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주기철 목사의 설교 도중에 일경들을 보내 아수라장을 만들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가운데 당시 평양의 민족지도자였던 조만식 선생에게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고 주기철 목사는 1936년 7월 민족주의자들이 모여있고 평양의 부호들과 중산층을 웃도는 신자들이 있는 산정현교회 부임 하게 된다. 


주기철 목사는 여기서도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굳은 반대의사를 설교하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설교를 했는데 조선총독부에서는 당시 악명을 떨치던 미나미 총독을 급파하여 평양의 교회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36년 10월 1일 마침내 총독부는 황국시민서사를 제정하고 황국신민 체조, 일장기, 일본천황의 사진, 일본국가를 널리 퍼트리며 민족말살정책에 나서기 시작햇으며

신사를 곳곳에 세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절을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강력한 탄압 앞에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회 총회에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고 주기철 목사와 일부 목사들은 이를 절대 묵인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일본군의 총칼 앞에 맞서며 끝까지 저항한다.  이로인해 주기철 목사는 1938년부터 1944년 순교할 때까지 5차례 투옥과 고문을 견뎌야 했고 채찍칠, 쇠못밟기,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수많은 고문을 견뎌야 했다. 이로 인해 주기철 목사의 몸은 반불구 상태였고 안질, 폐병, 심장병이 악화되며 더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이 된 5번째 형무소로 갇히기 직전 주기철 목사는 다음과 같은 설교를 남긴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말씀 일사각오의 설교다..




|하나님 곁으로 


일사각오의 설교를 마치고 투옥된 주기철 목사는 다시 일제의 모진 고문을 겪어야 했고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주기철 목사의 육신은 눈을 감게 되어 하나님곁으로 가게 된다. 1944년 4월 13일 이야기다. 


이때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에 주기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님 뵈옵구 싶구려...미음도 먹고 싶소... 나는 가나 산정현 양떼들은 어찌하리이까?" 이때 오정모 사모는 "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면 안심하겠소. 어머님을 많이 위로해 드리시오." 이 말을 최후로 사모님과는 작별했다.


그가 떠나는 날까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 곁으로 떠난 것이다.



끝으로 성경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신천지 및 이단의 활동이 금지되길 바란다. 사람을 믿는 이단 그리고 이를 악용하는 거짓들은 분명 죄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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